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크라이나-아르메니아 관계 (문단 편집) === 근세 === [include(틀:상세 내용, 문서명=아르메니아계 우크라이나인)] 키예프 루스와 [[루테니아 왕국]]이 멸망한 이후, 우크라이나와 아르메니아 사이의 교류는 국가 간의 외교 교류가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대신 인적 자원간의 문화, 경제 교류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. 그 이유는 크림 반도에서 북해까지 이르는 육상 무역로에서 [[카라임 유대인]]과 아르메니아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었다. 근세 당시 우크라이나를 지배하던 [[리투아니아 대공국]] 그리고 [[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]]은 [[크림 칸국]]의 정기적인 노예 사냥 습격을 받고 있었다. 한 편 크림 칸국 역시 폴란드 리투아니아 측의 물산이 필요했는데, 상시 폴란드와 전쟁 중이던 크림 타타르족들이 직접 무역을 하러 찾아갔다가는 칼빵 맞을 확률이 높았고,[* 크림 칸국이 동유럽에서 납치하는 노예의 수효는 매년 평균 2만여 명에 달했다.] 크림 칸국 측은 양국의 무역에서 [[중립]]에 가까운 입장이던 아르메니아인들을 활용하였다. 크림 반도 내에는 크림 타타르어를 사용하는 일군의 아르메니아인이나 유대인[* [[카라임]]이나 크림차크 유대인 등등] 커뮤니티가 있었고, 동유럽과 중부유럽을 잇는 무역 요충지였던 [[르비우]] 시에는 [[크림 타타르어]]를 모어로 사용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대거 정착하기 시작했다.[* 여담으로 크림 반도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르비우에 정착한 것과 반대로 카라임들은 주로 [[빌뉴스]]를 중심으로 정착했다.] 아르메니아 역사에서 르비우의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는 나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데, 1616년 역사상 최초의 아르메니아어 서적 인쇄소가 르비우에 들어섰기 때문이었다. 한 편 중세 [[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]] 시절 도입이 시도되었다 아르메니아 민중들의 반발로 실패한 [[아르메니아 가톨릭]]이 르비우 시의 아르메니아인 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자리잡았다는 점도 특이할 만한 일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